밖에 나갈 수가 없다. 출퇴근을 안 하는데도 왜 이렇게 할 게 많을까. 오늘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바쁠까. 직장인들이 오전 근무를 벌써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어슬렁거릴 시간에 나는 종종 집에서 혼자 지치곤 한다. 그저 카페에 가서 책 좀 읽고 깔짝 영어 공부라도 할 생각이었을 뿐이데 온갖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집에서 나가는 게 일이다.
밥을 해 먹고 있다. 밥을 먹으려면 쌀을 씻는다. 현미는 미리 씻어놔야 불릴 수 있다. 찌개를 끓인다. 찌개의 내용물을 채우기 위해 장을 봐야 한다. 금방 상해버리는 야채들은 한 번에 많은 양을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엄청 적은 양을 팔지도 않는다. 부엌에 마땅히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 껍질을 벗겨내고 잘라내어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양파를 키친타올에 한번 감싼 뒤 비닐 팩에 보관한다. 남은 두부는 적당히 물에 잠기게 해 락앤락에 보관한다. 아, 음식물 쓰레기도 비워야 되는데.
어딘가 뒤틀린 성격 때문인지 겁이 나서 항상 찌개를 약한 불로 끓인다. 찌개가 아주 천천히 끓는 동안 빨래를 돌린다. 건조대에 놓인 빨래를 걷는다. 접는다. 넣는다.
음식을 먹는다. 짧은 유튜브를 본다. 다 먹고 나면 가능한 바로 설거지하려고 한다. 가끔은 밥을 먹으면서 빨래를 개기도 하고, 설거지하다 말고 냉장고를 정리하기도 한다. 어느새 일어난 지 2시간 정도가 그냥 지나간다.
요리하고 청소하는 게 사람에게 아주 당연한 일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친다. 솔직히 힘들다. 하면서도 뭔가 쫓기는 기분이다. 내 시간이 없다고 느낀다. 어느새 짜증이 올라온다. 집 안 구석구석 모든 게 다 일거리라고 느껴진다. 이걸 회사 다닐 때는 어떻게 했지?
어떻게 하긴, 대부분 외주화를 했다. 요리를 하지 않았다. 전부 사 먹었다. 장을 볼 필요도 없고, 냉장고를 정리할 것도, 설거짓거리도 없다. 밖에서 먹는 음식이 허술하고, 돈이 아깝다고 느끼면서도 그냥 사 먹는다. '나는 일을 하니까.'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집밥이나 집안일을 특히 사랑하거나, 자급자족하는 삶에 뜻을 두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수입이 없는 동안 되도록 검소하고 자연스럽게 생활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고 나니 생활이 일이 돼버렸다.
한 가지 더 얻은 일상의 깨달음은 내 멘탈이 아주 약하다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스트레스를 느낄 정도로 취약하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나니 거실에 먼지가 밟힌다. 갑자기 화가 치민다. 청소기를 돌리며 거실이 울리도록 욕을 크게 내뱉는다. 'X같은 거, 끝나지를 않어.' 먼지가 날린다. 분무기로 물을 뿌린 뒤 휴지로 책상을 닦는다. 돌돌이로 러그를 닦는다. 이불 위도. 그러다 강하게 두들긴다. 'XX! 하기 싫다고!!!' 가습기에 물을 채운다. 내가 마실 물도 채운다. 어휴. '지겹다, 지겨워.'
뜬금없이 분노 모드나 절망 모드로 변하는 건 퇴사 전에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고 지금이 싫냐고 하면 아니다. 스트레스의 종류와 정도가 다르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 솔직히 확실히 분명히 '덜-'한 스트레스인 거다. 이건 사실 푸념이다. 다만 생각했던 것만큼 자유롭지 않고, 찌질한 모습이라는 게 아쉬워 적는 반성문 같은 거다. 이렇게 적고 나면 조금 후련해질까 해서.
백수로 산다는 건,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일의 종류가 생활 전반으로 넓어지는 거다. 숨 쉴 시간이 많은 만큼 한숨 쉴 시간도 많다는 것. 지독한 일을 좀 덜 겪는 대신, 좀 더 일상을 지독하게 살 뿐이다.
*어쩌면 나같은 형태의 백수에게는 집안일이 하루 중 유일하게 가시적으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행위인 것 같다. 그래서 하기 싫어하면서도 쉽게 그만둘 수가 없는 걸지도.
*가사 노동이 노동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데는 사회적 인식도 있겠지만 노동을 하는 당사자의 혼란스러움도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내가 한 노동하고 내가 칭찬할 만큼 강단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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