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Q

산책의 동선

Snackim 2023. 4. 11. 01:51

결국 글을 쓰지 못했다. 글 쓰는 모임도 만들지 못했다.

 

대신 집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바나나를 먹었다. 시답잖은 인디 게임을 하다가 빨래를 했다. 기타도 쳤다.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튕김이었다. 어제 사 온 만화책도 슬쩍 열어 봤다. 한참 집에 있었다. 모니터 아래에 놓인 시계를 볼 때마다 분침이 빠르게 꺾였다.

 

배가 고파서 안 나갈 수가 없게 되었을 때가 돼서야 집을 나섰다.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려고 했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도 챙겼다. 일기를 쓰려고 다이어리도 챙겼다. 오후 4시의 중국집에는 손님이 없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의 달콤한 휴식을 방해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볶음밥을 먹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막상 카페에 가기 싫어졌다.

 

목적을 잃은 가방을 메고 산책을 했다. 처음에는 낙성대 공원에 가려고 했는데 서쪽으로 지는 해가 눈 부셔서 길을 틀었다. 다시 집 쪽으로 향했다. 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봄의 더위가 느껴졌다.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옷과 가방을 벗고 앉았다. 70대쯤 보이는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니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 할아버지와 눈이 몇 번 마주쳤다. 시선이 신경 쓰여 앉아 있기가 싫어졌다.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시 낙성대 공원으로 향했다. 그러다 가려던 길이 공사 중이라 막아놓은 것을 발견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섰다.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싶었다. 집으로 가다 말고 관악산 방향의 산책로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하릴없이 산책 중인 할아버지와 강아지를 산책 중인 성인 여성을 지나쳤다. 10분쯤 오르자 나무로 된 쉼터가 보였다. 옷과 가방을 내려놓고 누웠다. 쉼터 기둥에 돗자리와 우산이 가지런히 걸려있는 걸 보았다. 동네 어르신들의 아지트일까?

 

정말 백수답게 산책하면서 느낀 건데, 비슷한 동선의 6, 70대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공원에 나와 벤치에 앉는다. 새로 생긴 길로 다녀보기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한다.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을 보면 한심하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인생이 목적 없이 산책하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걸로 수렴하는 게 아닌가. 사람의 삶은 나선 방향이라는 말을 믿어왔었는데, 오늘은 그게 소용돌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방향으로 돌며 상승하는 용수철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하지만 무겁게 하강하며 중심으로 소멸하는 소용돌이.

 

쉼터에서 한참을 눕기도, 앉기도 하며 나무와 꽃을 구경했다. 문득 이런 자연 속에서 사는 건 어떨까 했다. 어차피 이런 삶으로 수렴한다면,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면 어때. 성격에도 꽤 맞을 것 같은데. 역시 자연이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그러다 괜스레 개운해졌다. 왔던 길이 아닌 산 쪽 방향으로 돌아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마구마구 했다. 시답잖은 게임을 하고, 뭘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유튜브도 봤다. 어제 유리가 나눠준 똠얌꿍 라면을 끓여 먹었다. 꺼-억.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이라는 게 도통 알 수가 없다.

 

글을 왜 써야 하나. 무얼 하려고 하나. 어디에 도착하려고 그러나. 그래도 지금,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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