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며칠 전부터 오늘을 당근 거래의 날로 삼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선은 쏘카로 뒷자석이 접히는 SUV를 빌려놨다. 대충 짐이 실릴 수 있는 크기를 검색했고, 들어갈 수 있는 물건들의 크기를 계산했다. 한번에 집으로 옮길 수 있는 크기와 거리를 따져서 미리 약속을 잡아놨다.
새 집에 이사한 지 2주차, 살림살이를 늘리는 재미를 한창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흥분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거래 하나가 취소됐다. 소파 스툴과 사이드 테이블을 거래하기로 한 사람이 PCR 검사와 기차표 문제로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당일 거래가 어렵다고 채팅이 왔다. 애초에 계획한 구매가 4건이었는데, 그 중 2건을 약속한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니 김이 샜다. 물론 내일 오전에 거래를 할 수도 있지만 차를 또 빌려야 한다. 값을 깎으려다 현타가 와서 그냥 다른 소파를 알아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첫번째 거래 - 13:00 낙성대 2번 출구 / 노베이션 마스터키보드 판매 / ₩130,000
마침 어제 저녁에 뮬 악기장터를 통해서 문자가 왔다. 폴더폰으로 바꾼지 얼마 안돼서 문자가 느리다는 그는 예상대로 어린 친구였다. 20살이 갓 넘은 모습이었다. 내가 20대에 겪은 중고거래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때 받았던 (아마도) 음악하는 형들의 호의를 떠올리며 만원을 깎아주었다. 그는 경직된 표정을 풀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물건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을 (음악 얘기든, 물건에 관련된 추억이든, 그에 관련된 질문이든) 꾹 참고 지하철역으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쏘카가 있는 주차장으로 가기 전 다이소에 들려 구두 주걱과 방향제 등을 샀다.
두번째 거래 - 14:15 낙성대역 근처 / 바테이블 구매 / ₩76,000
이사를 오고 나서야 전 집에 놓여있던 아일랜드 식탁의 가치를 알게 됐다. 주방-살림영역과 거실-놀이영역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것이다. 주방일은 하기가 싫지만, 왠지 한번 쓰윽 만지고 싶은 식탁을 보고나면 설거지는 못 참는 것이다. 나만의 작은 스타벅스 창가 자리? 막이래.
파란색 바탕에 귀여운 무늬가 들어간 수면바지를 입은 남자와 그의 애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해체된 테이블을 1층까지 내려주었다. "잘 꾸미시면 정말 예쁠 거예요" 남자는 거래가 끝나고나서 굳이 필요가 없는 말을 덧붙였다. 기분이 좋았다. 작은 동네 공동체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좋은 제품을 싸게 얻은 것 같아서 너무 좋네요" 나도 불필요하고 친절한 말을 덧붙였다.
집에 와서 조립을 하고 보니 나사가 두개 모자르다. 그는 늦은 밤까지도 답장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만족한다.
세번쨰 거래 - 16:30 봉천역 근처 / 이케아 주방조리대 구매 / ₩40,000
봉천역 근처의 아파트 단지로 차를 몰았다. "106동 ****호요!" 아파트 입구를 지키는 관리실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마치 설에 가족을 찾아 온 것처럼. 주차장이 아닌 곳에 주차를 하고 22층까지 올라가게 했다는 게 조금 열받는 포인트지만, 그는 매우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일하는 중이라 나가지를 못했네요" 쓰지도 않은 조리대를 엄청 깨끗하게 관리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 그가 썩 밉지 않았다.
아쉽게도 내 상상과 달리 전자렌지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원래 제품의 의도대로 조리대로 쓰기로 마음 먹었다. 바퀴가 달렸다는 것과 혼자 쉽게 들 수 있다는 점, 원목으로 이뤄졌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새로 약속을 잡은 소파 거래 장소로 차를 돌렸다.
네번째 거래 - 17:00 신림동 / 소파 구매 / ₩120,000
소파는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더 싸고, 더 큰 제품도 있었지만 거실에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했다. 적당히 짧고, 팔걸이가 없는 디자인이 꽤 마음에 들어서 결정했다. 오히려 좋아! 다소 예산을 벗어났지만 새로 사는 거에 비하면 여러모로 좋아!
신림동의 한 커피숍 앞에 차를 댔다. 같은 건물 계단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당근 거래의 재밌는 점은 채팅의 상대가 어떤 모습인지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는 거다. 아주머니는 엘레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4층으로 안내했다. 나는 혼자 소파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면 가격을 깎아도 되는 걸지, 얼마나 깎는 게 적당할지 잠시 고민했다.
4층 계단에는 작은 2인용 소파 뿐만 아니라 키가 작은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소파를 칭찬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쿠션감을 확인하며, 이 소파를 만나려고 이 고생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게 마저도 혼자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그런데 굳이 백발의 할아버지가 도와주겠다며 먼저 소파 한쪽을 잡고 계단 아래로 향했다. 나는 최대한 밑으로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소파를 들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왠지 손해본 것 같은 마음이 싹 가셨다. 뭐랄까 대단한 효도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거실에 소파를 두고 나니 흡족했지만, 무언가가 아쉬웠다. 소파에 맞는 테이블이 없는 것이다. 쏘카 예약 시간은 2시간이 남았다. 나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충동 사이에서 새로운 거래를 잡았다.
다섯번째 거래 - 18:30 상도동 / 사이드 테이블 구매 / ₩45,000
거래 횟수로 친다면, 그리고 필요성이나 계획성을 따진다면 오늘의 소비는 매우 사치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이번 거래는 충동적인 소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당근의 세계는 마치 거래를 하면 할수록 절약을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환경 보호를 하는 뿌듯함 마저 들게 했다. 사실 물건들이 원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저렴하지도 않다. 차를 빌렸으니 기름값을 따지고, 내 시간의 비용을 생각한다면 이득을 본 건지도 의심스럽다.
마지막 거래는 제일 먼 곳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는 동안 시간이 좀 걸렸다. 대신 제일 가벼운 물건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틀즈 플레이리스트를 다 들었다. 이 재생목록을 만들고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틀어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소파 앞에 테이블까지 놓고 나니 모든 게 완벽하다. 이 글도 이 테이블 위에서 적었다. 이제 소파에 앉아 악기를 치고, 테이블에 노트북과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놓고 음악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온다.
차를 반납하고 집에 오는 길에 와인을 한 병 샀다. 시장에 들려 치킨도 한 마리 샀다. 소비 횟수로만 치자면 오늘은 매우 사치스러운 날이다. 오히려 좋다. 그동안 내 충동을 건드렸던 소파들 중에 하나를 새 걸로 샀다면, 더 많은 비용과 쓰레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오늘의 고생을 나름의 방식으로 자축한다.
남은 숙제는 거실에 놓인 암체어를 파는 것이다. 점점 내 공간이 내가 원하는대로 변해갈 것이다. 와인은 그리 달지 않지만 흥이 오른다. 소비는 즐겁다. 공간을 꾸미는 건 재밌다. 직접 움직여서 뿌듯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거... 적성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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