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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프탈렌 트랩

나프탈렌 냄새가 코 안쪽까지 가득하다. 아마도 공기 중의 입자들이 내가 자는 동안 깊숙히 들어 온 거겠지. 아니면 망상이거나.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걱정인지 모르겠다. 엊그제 술을 잔뜩 마시고 자기 전에, 천장에 붙은 바선생(여기서 그의 이름 대신 선생 호칭을 붙이는 것은, 그 편이 기억을 불러오면서 입는 정신적 피해가 덜하다는 걸 뒤늦게나마 공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나보다 윗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 이중적인 패배감이 들긴 하지만 이것이 그나마 적절한 관습적 명칭이라고 생각했다.)을 보았다. 괴로운 밤을 보냈다. 잠을 설쳤다. 다음날 다이소에서 바선생 퇴치제를 샀다. 그 옆에 방충효과와 냄새 제거에 탁월하다는 나프탈렌도 샀다. 예전에 한두번 써봤는데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다. 집에 돌아와 싱크대..

2023/2Q 2023.05.15

낙성대역 커피빈이 사라짐

커피빈에 가려고 애써서 집에서 나왔다. 그게 오후 한시반쯤. 나름 꽤 걸어야 도착한다. 근데 웬 걸, 간판이 사라졌지 뭐야. 횡단보도를 건너오면서 허탈했다. 조용하고 넓은 카페라서 좋아했는데. 아마도 같은 이유로 없어진 것이겠지만. 마음에 퍽 들어서 멤버십 앱도 깔고 충전도 해서 쿠폰도 받았다. 오늘도 쿠폰을 쓰려고 했다. 다른 커피빈에 가볼까? 가까운 곳은 서울대입구역 지점. 하지만 거긴 사람이 많다. 특히 어린 흡연자들. 창문도 다 열어놓고 뭔가 시끄러워 보인다. 그다음은 방배동 카페골목. 버스를 하나 타면 23분. 까짓거 이렇게 된 거 새로운 동네 구경한다 셈치고 가보자. 다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러나 버스정류장 앞에서 다시 생각했다. 에바야. 시간을 들여 뻔한 데를 갈 바에야 그냥 동네에 다른 ..

2023/2Q 2023.05.12

산책의 동선

결국 글을 쓰지 못했다. 글 쓰는 모임도 만들지 못했다. 대신 집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바나나를 먹었다. 시답잖은 인디 게임을 하다가 빨래를 했다. 기타도 쳤다.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튕김이었다. 어제 사 온 만화책도 슬쩍 열어 봤다. 한참 집에 있었다. 모니터 아래에 놓인 시계를 볼 때마다 분침이 빠르게 꺾였다. 배가 고파서 안 나갈 수가 없게 되었을 때가 돼서야 집을 나섰다.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려고 했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도 챙겼다. 일기를 쓰려고 다이어리도 챙겼다. 오후 4시의 중국집에는 손님이 없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의 달콤한 휴식을 방해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볶음밥을 먹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막상 카페에 가기 싫..

2023/2Q 2023.04.11

모든 게 다 일이다

밖에 나갈 수가 없다. 출퇴근을 안 하는데도 왜 이렇게 할 게 많을까. 오늘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바쁠까. 직장인들이 오전 근무를 벌써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어슬렁거릴 시간에 나는 종종 집에서 혼자 지치곤 한다. 그저 카페에 가서 책 좀 읽고 깔짝 영어 공부라도 할 생각이었을 뿐이데 온갖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집에서 나가는 게 일이다. 밥을 해 먹고 있다. 밥을 먹으려면 쌀을 씻는다. 현미는 미리 씻어놔야 불릴 수 있다. 찌개를 끓인다. 찌개의 내용물을 채우기 위해 장을 봐야 한다. 금방 상해버리는 야채들은 한 번에 많은 양을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엄청 적은 양을 팔지도 않는다. 부엌에 마땅히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 껍질을 벗겨내고 잘라내어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양파를 키친타올에 한..

2023/2Q 2023.04.03

퇴사 후 3달

4월 1일이다. 퇴사한 지 벌써 3달이 지났다. 뭘 한 건지 모르겠다. 라고 뱉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회사를 다닐 때도 늘 그래왔듯이. 실은 조금, 예상했듯이. 그렇다고 지금까지 보낸 시간을 쉽게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자세히 세어보면 소중할 기억들을 폄하할 각오도 내겐 없다. 분명 거기에는 편안한 휴식도, 선명해지고 싶어 하던 의식의 탐구도, 그리워하던 이들과의 벅찬 만남도 있었다. 단지 퇴사하기 전의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했다는 것과, 되고 싶었던 모습으로부터- 한참 멀리, 그것도 팔짱을 낀 채 (다리도 꼬고) 있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예를 들면 영화를 많이 보고 싶었다. 고전 명작부터 섭렵하기 시작해서, 어떤 광적인 디깅을 하는 영화광의 모습이랄까... 시간이..

2023/1Q 2023.04.01

[기억들] 초등학교 때의 기억 두 가지

5월, 밤에 낙성대 공원을 걸으며 떠올린 기억들 몇 가지를 기록하기 위해 적어둔다. 기억1 자양동에 살 때. 정이네에 꽤 자주 놀러갔다. 우리 집에서 200m 정도의 가까운 곳에 있는 주택이었다. 반 친구들 중 몇이서 모여 정이네 집에서 놀곤 했다. 우리는 거실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공포 영화를 같이 보곤 했다. 같은 유명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제목을 알 수 없는 B급 영화 비디오를 빌려와서 보기도 했다. 그중에 목이 잘린 닭이 뛰어다니는 영상은 꽤나 충격적이어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마당과 옥상을 오가며 술래잡기를 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거실에서 술래가 눈을 가린채 유령놀이를 하다가 히터에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다. 머리에 혹이 났던 기억 또한 선명하다. 그때까지는 그 친구를 이성으로 생각해..

2022/6 2022.06.05

상담 3회기, 팡팡 울었다

5월 한 달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상담이다. 난생 처음 받아본 상담을 통해,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고, 나를 대하는 법이나, 관계 등등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총 5회기로 예약된 나의 상담은 5월 2일 부터 5월 31일 까지 5월 한 달을 꾹꾹 채워서 끝이 났다. 후련한 기분이다. 특히 기억나는 건 3번째 상담이다. 말하던 도중에 울었다. 쓰려면 길고 민망해지니까 요약하려고 한다. 과거에 대한 상실이 키워드인 것 같다. 뭘 잊어버린 것 같냐는 질문에, 희와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하면서 장면을 떠올리려고 했다. 처음 희를 봤던 공간이나, 희의 표정이나 그런 것들이 머릴 스쳐갔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났다.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끄억끄억 소리내며 울었다. 그제..

2022/6 2022.06.01

[하루들] 3월 28일 - 베이스 카피의 기쁨과 슬픔

어제는 꽤 오랜만에 후련한 마음으로 맞이한 일요일 밤이었다. 내게 3월 한 달은 힘든 시간이었다. 툭하면 화가 치밀었다. 회사 차를 운전하다가 괜히 욕을 내 뱉곤 했다. 앞 차를 향해서, 추월하는 택시를 향해서, 회사 사람들을 향해서, 나를 향해서. 블랙박스로 본 세상에 내가 나왔다면 싸이코패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욕을 했다.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촬영 중에도, 편집 중에도, 담배를 피다가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도, 퇴근길에도,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하면서도 그랬다. 허무하다, 언제 끝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생각을 계속 했다. 주말을 보내는 시간 마저 썩 좋지 않았다. 휴식 같지 않았다. 평일을 보상받듯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2022/3 2022.03.29